[파라노이드 통권 23호] 너무 빠르고 안타까운 상실, 신해철의 삶과 음악

BACK STAGE

2004 ⓒ 전영애


신해철의 발인을 앞둔 지난 10월 31일 새벽 서울 아산 병원 장례식장 입구에는 고인의 팬들이 하나둘 모여서 작은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찬 공기 속에서 너무나 고즈넉했던 그 날 새벽은 작은 바람 한 줄마저 시야에 매섭게 다가왔다. 조그마한 스피커에서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는 그의 음성에 맞춰 조용히 읊조리는 사람들의 눈가에는 평온함에 숙연함이 더해갔다. 그 속 그득한 슬픔을, 그 누구도 꺼내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일어나라 대한민국. 고인의 오랜 바람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처럼 우리는 또 하나의 결로 마주한 하루와 내일에 당당해져야 한다. 이제 떠났다. 그가... 신해철... 그가 우리를 맞이하러 먼저 떠났다.


신해철의 음악에 투영되었던 시대의식

10월 22일 갑작스런 심정지로 입원을 했던 신해철은 5일 동안 생사를 오가며 무의식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10월 27일 오후 8시 19분, 신해철은 가족은 물론 수많은 대중들의 바람과 희망의 소리를 간직한 채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이라는 사인으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고인이 된 신해철은 과거 방송된 한 프로그램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영상으로 유언을 남긴 바 있다. 고인은 이 방송에서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아들,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지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가장 절대적인 뮤지션이자 가수였던 신해철의 음악은 대한민국 3040세대들에게 젊은 날의 동화였고 자화상이었다. 갑작스레 쓰러진 이후 아무런 교감도 없이 홀연히 떠나버린 고인이기에 우리는 그에게 적잖은 빚을 지게 된 셈이다. 그가 우리에게 찾아왔던 시작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의 삶과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고인의 죽음이 알려진 그 날 밤의 SNS는 오로지 ‘신해철’,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했다. 6장의 솔로앨범과 넥스트 시절 6장의 앨범, 그리고 무한궤도 시절 발표되었던 한 장의 앨범, 윤상과 변진섭 등과 각각 함께 했던 조인트 앨범 등을 통해 그가 남긴 노래들은 음악이 흐르는 모든 공간에서 그의 꺼진 호흡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대에게’,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날아라 병아리’, ‘인형의 기사’, ‘집으로 가는 길’, ‘불멸에 관하여’, ‘재즈카페’, 그리고 ‘안녕’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각자가 듣고, 서로 다른 이들이 신청해서 공감하던 그의 노래는 모두 불후의 명곡이었으며, 시대를 대신하고 감싸 안았던 희망가였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고인은 세상과 음악에 대한 이해심이 많은 뮤지션, 아니 아티스트였다. 급격하고 격렬하기도 했던 그의 성품은 시대에 의해 더해졌고 승화되어 나왔다. 


새로운 단계에서 떠남으로 더욱 안타까운 죽음

솔로와 듀엣, 밴드 음악에 이르기까지 고인의 음악은 대한민국 그 어느 뮤지션보다 방대한 영역을 완성해 나왔다. 영화와도 적잖은 인연을 보였던 고인은 1991년 ‘하얀 비요일’에 참여한 이후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통해 첫 영화음악감독 작업을 맡기도 했다. 고인의 가장 열정어린 음악이 집결되었던 그룹 넥스트는 2006년 5.5집과 싱글 앨범 [666]을 마지막 앨범으로 정지된 상태였다. 유작이 된 여섯 번째 솔로앨범 [Reboot Myself 6th Part 1]는 무한궤도와 솔로 앨범의 종지부를 찍는 새로운 시야를 갖추며 발돋움하려던 [Myself] 앨범의 기운을 닮았다. 넥스트의 힘이었던 실험적인 요소와 뮤지션 신해철의 본질이었던 비판적 의식이 함께하는 타이틀곡 ‘A.D.D.A’는 분명히 신해철 음악의 새로운 화두였다. 그리고 ‘단 하나의 약속’은 그의 애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슬픔을 더한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만든 사랑 노래를 15년 동안 다듬고 매만져서 이제야 내놓게 되었다.”고 설명했던 고인은 자신의 부인에게 약속받고자 했던 바람이 오히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될 줄 알았을까? 뮤직비디오 ‘A.D.D.A’와 ‘단 하나의 약속’을 보고 들어 보라. 이토록 극적인 유작이 있을 수 있을까? 고인은 새로운 변화를 선보이며, 그 다음 단계를 진행하고자 준비해 나왔던 순간에 세상을 등짐으로써 안타까움을 더한다.


고인의 음악과 인생, 그리고 삶에 대한 철학은 겉은 화려해 보였지만 끝없는 투쟁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창작자의 슬픔이 아닌 완성되지 못하고, 완성될 수 없는 인간 세상에 대한 아픔이었다. 고인은 유작 앨범인 [Reboot Myself 6th Part 1]의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의미 있는 말을 언급했다. “인간의 소명은 태어나는 것.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신이 우리에게 주는 보너스이다.” 믿고 싶지 않은 죽음이 적잖은 즈음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음악에 경의를 표한다. 글 고종석



WELCOME TO THE WORLD HE MADE


정기송, 임창수, 김세황, 데빈으로 본 신해철 음악의 변화

① 기타, 신해철 음악의 프리즘


본인도 인정한 바 있지만, 신해철은 그야말로 오지 오스본 못지않은 기타리스트 헌터였다. 건반과 전자악기가 그의 차가운 이성과 논리를 대변했다면, 기타는 그의 어린아이 같은 쾌락에 다름 아니었다. 훌륭한 기타리스트는 그의 음악에 있어 자신이 원하는 쾌락의 진동을 충분히 구현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를 거쳐 간 기타리스트들은 당시 신해철이 원했던 음악적 쾌(快)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정기송 신해철의 ‘트레버 레빈’

신해철은 한국형 ‘아레나 락’의 전형으로 불러도 좋을 법한 ‘그대에게’로 데뷔했지만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부르며 “여러분 사랑해요”를 속삭일 줄도 알았다. 정기송은 락이 대중음악의 가장 치열한 방법론임을 자각한 신해철의 음악세계를 잘 이해했다. 사운드와 연주 모든 면에서 그랬다. 그는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단정하고도 밀도 있는 디스토션 톤은 뉴웨이브적인 전자음이 강조된 건반과 잘 어울렸다. 그로 인해 두텁지 않은 중저음역대와 인위적인 고음 사이를 미끄러져 다니는 신해철의 목소리는 한층 독특한 개성을 갖게 됐다. 그러나 당시 신해철의 레퍼런스는 신쓰팝이라기보다는 예스(Yes)에 가까웠다. ‘외로움의 거리’, ‘Turn Off The TV’ 등의 곡을 들어보면 순간순간 긴박하게 터치는 리듬 스트로크에 방언처럼 확 펼쳐지는 기타 솔로 등은 연주로 표현할 수 있는 락의 모든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의도의 작법이었다. 정기송은 그런 신해철의 트레버 레빈이 돼 준 셈이다. 정기송과 신해철의 인연은 넥스트뿐만 아니라, 시인 유하의 감독 데뷔작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등에서도 이어졌다. 참고로 그는 핌프 락 스타일을 표방한 문희준의 음악을 프로듀스하기도 했다. ‘오인용’ 시리즈 등으로 락 팬이 아닌 전 국민들에게 폭격을 맞고 있던 문희준에게 “소주 한 잔 하자”며 신해철이 위로의 말을 건넨 것도 이런 인연 덕분(?)이 아닐까.


임창수 넥스트가 핑크 플로이드는 아니었다

“그가 코르그, 야마하를 합친 악기사의 대표가 된다 해도, 그가 가진 기타리스트로서의 재능에 비할 바는 아니다.” 신해철이 잡지 않았지만 가장 아쉬워했던 기타리스트로 알려져 있는 임창수. 정기송이 재기발랄한 편이었다면 임창수는 신해철의 작곡다도 더 공간감 있고 다차원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때로 진지하기까지 한 그의 연주는, 인기의 절정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불명예 제대한 신해철의 음악세계에 새로운 전기가 되어 준 것은 분명했다. 넥스트의 2집 [The Return Of The N.EX.T Part I: The Being](1994)은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재기하려는 신해철의 몸부림이 담긴 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전작보다도 더 곡 전체를 지휘하려는 성향이 큰 앨범이기도 하며 이에 따라 약간의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The Dreamer’ 같은 곡에서처럼 임창수는 신해철의 조바심을 한 톤 낮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견 데이빗 길모어(David Gilmour)나 앤드루 래티머(Andrew Latimer) 같은 사색적인 면을 갖고 있기도 한 기타리스트다. 하지만 넥스트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였던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위축되긴 했지만 신해철은 곧 ‘방방’ 뛸 날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물론 임창수도 ‘껍질의 파괴’, ‘이중인격자’ 등의 곡에서는 스윕 피킹과 양손태핑을 활용한 테크니컬 플레이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 군더더기 없고 멜로디 라인을 중심으로 수렴해 가는 방식의 연주이다 보니, 요점이 분명하긴 했지만 화려하게 좌악 펼쳐지는 느낌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혹자들은, 넥스트의 [The Return Of The N.EX.T Part I: The Being] 전체가 세션맨 이미지가 강했기에 이 한 장으로 임창수의 연주를 말하는 것은 무리라 보기도 한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연주적인 면에서나 사운드적인 면에서나 임창수가 보여주지 못한 것은 없다. 다만 바로 이어지는 앨범이 넥스트의 황금기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후 임창수는 악기와 미디 관련 회사를 설립, 성공한 기업인으로 거듭났다.


김세황 넥스트를 사랑한 한국형 락 아이콘

신해철은 연주력만 좋은 기타리스트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진지한 문제의식을 다룬 곡들일지언정 무대에 섰을 때 사람들을 파티 분위기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연주자를 필요로 했다. 김세황 역대 넥스트 기타리스트 가운데 그러한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연주자였다. 특히 연주와 액션이 조화된 연출력은 타고난 것이었다. 사운드적인 면에서도 락 키드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기표를 나름의 방법으로 소화해냈다는 점이 더욱 컸다. 요컨대 처음 만나는 한국형 락 아이콘이었던 셈이다. 락 스타들의 내한공연은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드문 일―인데다 거기 좌석까지 놓아야 한다는 희한한 규정까지―이었다. 막연하게나마 ‘본토 필’ 나는 기타리스트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밴 헤일런(Van Halen)적 하모닉스라든가, 메틀 사운드를 내면서도 퓨전적인 리듬감과 모드 활용을 통해 세련된 연주를 동시에 펼친 그는 약관에 이미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됐다.

김세황은 신해철과 넥스트의 음악을 정말 ‘좋아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The Return Of N.EX.T Part II: The World]나 [Lazenca: A Space Rock Opera]를 작업할 당시의 일화뿐만 아니라, 그 때를 회상할 때조차 그는 신해철의 음악적 의도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신이 참여하지 않았던 1, 2집의 곡들을 실황에서 연주할 때의 몰입도를 보면, 신해철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느껴지곤 했다.

김세황은 팝적이거나 멜로딕한 사운드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금 넥스트 기타 사운드를 혼자서 맡게 된 [Trilogy 666]에서는 [Lazenca]의 ‘Power’ 같은 곡을 몇 배 확장시킨 부피감과 그루브로, 넥스트의 음악뿐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한 단계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즉 그는 신해철의 음악적인 아이디어와 진보에 대한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독자적인 방향을 제시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누구 하나 없이 고인의 죽음을 애통해했지만 김세황의 눈물은 더욱 특별했던 까닭이다.


데빈 임창수의 트랜스포머?

김세황처럼 24세에 신해철에게 발탁된 기타리스트 데빈. 비트겐슈타인에서의 활동을 보면 그가 전위적인 면이 강한 연주자로만 알려졌지만, 넥스트의 이름으로 함께할 때는 메틀 기타리스트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선보였다. 뉴메틀적 그루브감에 스래쉬적 질주감을 더하는 방식, 거기에 주제선율을 충분히 제시한 후 터져 나와야 할 부분에선 고난도 프레이즈를 제시하는 방식은, 임창수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The Return Of N.EX.T Part III: 개한민국]과 2집 [The Return Of The N.EX.T Part I: The Being]을 같이 들어보길 권한다. 임창수의 감각이 앞선 것이기도 하지만, 데빈도 신해철의 못다 꾼 단꿈을 현대적으로 변신시켜 좋은 연주를 만들어냈다. 물론 데빈 쪽이 아무래도 시대에 따른 기술적 발전의 영향으로 미드레인지가 강하고 펀치감 있으면서도 정돈된 톤을 들려준다. 신해철은 음악 전체를 설계하는 사람이지만 연주자, 특히 기타리스트의 개성은 최대한 뽑아내는 음악가였다. 바꾸어 말하면 데빈의 개성 역시 신해철과도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김세황을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해 데빈이 신해철과 활동한 시간은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았다. 다만 밴드 넥스트의 멤버로서 데빈은 그 실력에 비해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락 뮤지컬에 출연하는 등 다양하게 활동하긴 했지만, 음원을 중심으로 소비하는 풍토에서 더 이상 큰 공연을 치를만한 ‘빅 밴드’가 나오긴 쉽지 않았다. 신해철의 다양한 미디어 포섭 능력조차도 너무 급변하는 시대에 브레이크를 걸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2006년 11월 넥스트 탈퇴와 더불어 다소 잡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신해철이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지만 않았던들, 신해철과 더불어 조금 더 보여줄 것이 남아 있었을 연주자다. 글 한명륜



신해철 음악에서 가사의 중요성

② 가사, 신해철 음악이 던지는 화두


그의 가사는 이전에 보기 힘든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한편, 자아를 향한 고뇌를 멈추지 않았으며 한국어를 모국어로 둔 보컬리스트로서 많은 고민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해철 그리고 그가 몸담았던 넥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프로젝트에서 그는 이전까지 한국에서 만나보기 어려웠던 ‘서사’와 ‘함축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그의 음악을 듣는 이로 하여금 오래도록 고민할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의 실질적인 공식 데뷔작인 무한궤도의 유일한 앨범에서 성공을 거둔 ‘우리 앞에 삶이 끝나갈 때’ 와 같은 곡의 가사를 살펴보면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의 / 후횐 없~노라고’와 같은 철학적인 문장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아를 향한 질문은 신해철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내용으로 넥스트의 2집 [The Return Of N.EX.T Part I: The Being]에 수록된 ‘The Ocean’의 가사를 살펴보면 ‘그대여 꿈을 꾸는 가 /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 /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하기를 바라는 가 / 사라져 가야한다면 사라질 뿐 / 두려움 없이’와 같은 가사가 발견 되며, 이어지는 앨범 3집 [The Return Of N.EX.T Part II: The World]에 수록된 ‘Question’ 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 나는 무엇을 보았고 또 느껴야 하는 가 / 내게 다가올 그 날이 오면 / 나는 무엇을 찾았다 말해야 하는 가 / 세상을 알게 될수록 / 내 무거워진 발걸음은 / 아직 내가 걸어야 할 남은 세월을 / 두렵게 하네’라는 고뇌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이러한 자아를 향한 고뇌 외에 신해철이 만들어낸 가사의 의미는 바로 사회를 향한 문제를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의식은 좀 더 개인적인 성향을 띄었던 신해철 솔로에 비해 넥스트와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밴드에서 자주 드러나는데 ‘이중인격자’ 나 ‘Money’, 당시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힘겨워 하는 연인들을 위하여’와 같은 곡에서는 날카로운 주제의식을 지향하면서도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지적하고 있었다. 


또 신해철에게는 성공한 락 뮤지션이 된 다음에도 자신이 뮤지션을 동경하던 키즈 시절의 감성이 남아 있었는데 그와 같은 감성을 잘 담아낸 가사로 넥스트 1집 [Home]과 리메이크 앨범 [Regame]에 수록된 ‘영원히’를 꼽을 수 있겠다. 특히 2절에 등장하는 ‘처음 기타를 사던 날은 / 하루 종일 쇼 윈도우 앞에서 / 구경하던 빨간 기타 / 손에 들고 잠 못 잤지’ 라는 가사는 아직도 가슴속에 락을 향한 꿈을 간직하고 있던 수많은 락 키즈들에게 오래도록 남았다. 


앞서 언급한 가사의 주제의식을 떠나 신해철의 가사는 보컬리스트로서 어떻게 발음과 각운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의 솔로 2집 앨범 [Myself] ‘내 마음 깊은 곳에 너’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문구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살펴보면 내/ 마음/ 깊은 곳에/ 너 와 같이 멜로디의 전개, 박자에 따라 각운이 떨어지기 때문에 곡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더욱 부각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만약 내 마음/ 깊은 곳/ 에 너 와 같이 각운이 이루어졌더라면 원곡이 가지고 있는 의미 전달이 자연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고음역과 같은 부분에서 용이한 발음 등 뮤지션 신해철은 단순히 좋은 곡을 만드는데 고민했던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보컬리스트로서도 많은 고민을 했었고, 그와 같은 고민들을 실제 자신의 작품에 담아냄으로서 그의 뒤를 이어갈 많은 뮤지션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 했다. 모쪼록 그가 만들어낸 위대한 시어(詩語)들이 오래도록 살아 숨쉬길 바라며. 글 ShuhA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① 트리퍼 사운드 김은석 대표가 말하는 신해철의 음악작업 '이유 있는 고집, 완벽주의자'

트리퍼 사운드 김은석 대표와 신해철의 인연은 깊다. 그는 [정글스토리 OST], 넥스트의 [The Return Of N.EX.T Part II: The World], 그리고 윤상과 함께한 노댄스에 이르기까지, 신해철 음악세계의 내면과 외연에 대한 데이터를 두루 갖고 있는 엔지니어다. 그가 기억하는 신해철과 그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일인칭으로 풀어보았다.


정글스토리 OST

엔지니어로서 신해철과 첫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이 앨범에서 신해철 작업의 핵심은 코러스였다. 특히 코러스는 채널과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넥스트를 포함해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그는 코러스를 중시해 왔다. 특히 그것이 솔로에서는 본인 한 명의 목소리를 여러 번 겹쳐 코러스를 만들어냈다. 지금이야 가상의 공간에 채널들을 정리해가며 소리를 쌓지만, 그 당시 디지털 필름은 48트랙이 한계였다. 그래서 40채널정도로 작업하고 남는 8채널에서 승부를 봐야 했다. 8채널에 녹음한 코러스를 6채널로, 다시 4채널로 정리하는 이른바 ‘핑퐁’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랐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레코더 자체와 타이밍을 동기화할 수 있는 DAT의 레코더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활용해 믹스된 음원과 원래 녹음 트랙을 동시에 틀어놓고 연결하는 방법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코러스 작업에만 50채널 이상을 쓰게 되는 상황도 왔다. 한데 코러스만 전부가 아니었다. 1, 2절 가사부분은 다시 샘플로 떠서 다른 채널에 옮겨 놓는 작업도 필요했다.


Here, I Stand For You

해를 넘겨 작업한 싱글이다. 1996년 12월 31일까지는 무조건 작업을 끝내야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신해철은 넥스트 뿐만 아니라 MBC 라디오 ‘음악도시’ 일정도 소화해야 했다. 그렇다고 곡 작업을 설렁설렁 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 일정마저도 촉박했다. 따라서 일본에서 예정된 후작업을 위해서, 새해 1월 1일에는 매니저가 음원을 갖고 출국해야 했다. 최소한도 이 날 자정 전에 작업을 끝내고 쫑파티를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김세황의 기타 솔로 녹음까지 마무리된 것은 기어이 해를 넘겨 새벽 3시가 되었을 때였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역시 방대한 채널을 쓰면서 필연적인 ‘핑퐁’ 작업이 남아 있었다. 이게 끝난 것은 결국 다음 날 오전 8시였다. 사실 신해철과 나 모두 젊었던지라, 그렇게 힘들게 작업하며 불편한 상황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매니저를 통해 일본에서 구입한 최고급 꼬냑 한 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위해 애써 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믹스다운 같은 러프 믹스 

잘 알려져 있지만 신해철은 완벽주의자다. 레코딩이 끝나면 믹스다운에 들어가기 전에 대략의 믹싱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러프 믹스(rough mix)라 하는데, 신해철은 이를 본격 믹스다운처럼 했다. 그 과정에서 밸런스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니까 신해철과 작업한다는 것은 엔지니어 역시 완벽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No Dance 

윤상과 신해철 두 사람의 음악세계를 절반씩 펼쳐놓은 작품이었다. 두 사람이 각각 갖고 온 오리지널 신서사이저만으로도 박람회급이었다. 오버하임, 롤랜드 주노 시리즈는 물론이고 리듬 모듈은 그야말로 외국에나 가야 볼까말까한 롤랜드 808, 909 등이었다. 사실 이 작업은 좋은 재료의 맛을 충분히 살리는 요리사의 작업과도 비슷했다. 이 신서사이저 고유의 소리를 최대한 살려서 두 작곡가의 의도에 상응하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윤상의 사운드가 파노라마를 연상시킨다면, 신해철의 사운드는 임팩트가 관건이었다.


임팩트, 그리고 이수용 

신해철은 후기 넥스트 작업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작품의 드럼 세션을 이수용에게 맡겼다. 이수용은 어택 면에서 국내 어떤 연주자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의 체구는 호리호리하지만 이소룡의 킥처럼 순간적인 파워를 이용해 어택을 만들어내는 연주자였다. 심지어 [정글 스토리 OST] 수록곡인 ‘백수가’ 작업 때는 베이스드럼의 외피가 찢어져 매니저가 급히 낙원상가에서 공수해온 적도 있다. 그 피는 당일 교체한 새것이었다고.


신해철의 작업,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나

“음악 좀 들어라” 음악 학원을 운영할 당시 신해철이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라고 한다. 실제 내가 알고 있는 뮤지션 중에도 그만큼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의 음악 지식욕은 대단했다. 레코딩 중 쉬는 시간에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음악만으로 1시간 만담이 가능한 뮤지션을, 신해철의 사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유 있는 고집 물론 그의 고집스러움으로 인해 엔지니어로서 고생스러운 측면도 있었고, 작업 중에 불편한 상황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기에 모두 이유가 있었으며 나중에 나온 결과물을 들어 보면 납득할 수 있는 고집이었다는 것. 방대한 음악적 데이터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한 것은 반드시 진행하는 추진력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지금의 젊은 음악인들이 그의 음악에서 배울 부분은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인터뷰, 정리 한명륜



② 25년의 인연 JFS 마스터링 스튜디오 성지훈 대표


넥스트 3, 4집, 황금기의 사운드가 표준 

신해철만큼 자기 음악의 방향을 잘 알았던 뮤지션도 드물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이 대학가요제 우승 이후, 솔로 앨범을 준비할 때였다. 무한궤도와는 너무 다른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나는 그게 타이틀 트랙이라 직감했다. 심지어 그 곡은 친구인 원경이라는 작곡가의 곡이었다. 원경은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전 강변가요제에 참여했던 아기천사의 멤버였다. 그는 ‘뜨는 곡’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밴드 음악을 위한 토대가 되어 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그 당시 이미 넥스트 1, 2집에 대한 아이디어가 다 있었던 셈이다.


내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넥스트의 3집 [The Return Of N.EX.T Part II: The World], 그리고 4집 [Lazenca: A Space Rock Opera]는 대부분이 인정하듯 신해철 음악의 황금기다. 멤버들 사이의 조화력과 사운드 밸런스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수작이다. 그가 직접 프로듀스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은 직접 뭐라 말할 순 없지만, 넥스트 했을 때 떠오르는 사운드는 3, 4집이다. 특히 믹싱 때의 밸런스가 너무 좋아서 마스터링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당시까지 한국에 마스터링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일러도 마스터링의 개념이 제대로 소개된 것이 90년대 중반 정도. 그 전까지는 마스터링이 녹음 과정의 연장선 정도로만 인식됐다. 무엇보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마스터링 기계만 있으면 된다는 인식도 문제였다. 넥스트의 음악은 영국에서 마스터링이 이루어졌다. 물론 좋은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작업해주는 것은 해외 마스터링의 장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곡을 만들 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돼 돌아온다. 직접 마스터링 스튜디오를 하게 된 것도 원곡의 이미지를 제대로 살리는 마스터링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 될 뻔했던 아내 윤원희 

“진작에 프로듀싱 가르쳐 줬으면 제가 작업해서 완성했을 텐데…” 빈소에서 만난 고인의 아내 윤원희의 얘기였다. 10여년 전쯤, 미국에서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신해철은 당시 미국에 2년 정도 체류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듀싱에 대한 욕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사실 넥스트의 3, 4집은 밴드 사운드에 기계적인 느낌을 정교하게 입히는 영국식 사운드였다면, 2000년대 초반의 신해철은 앰프의 울림과 마이크 앰비언스 등 자연스러운 면을 강조하는 미국식 사운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윤원희 역시 당시 프로듀싱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의 사이는 부부라는 이름을 넘어선 유대감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남편의 작업까지 함께 하고 싶다는 열의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진 않았다. 한데 다시 내가 신해철의 유작을 맡게 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떤 면으로는 그것이 인연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떼창 성애자’ 신해철, ‘대~한민국’의 비밀 

신해철은 평소 말할 때 액션이 크다. 극적인 대화를 잘 하는 만큼 과장을 잘 하는데 그것 역시 나름의 미학인 셈이다. 그래서 다소 고생을 했던 작업이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함성이다. 당시 대학로의 SH홀이라는 공연장에서, 약 500명의 붉은 악마가 모일 것이라는 게 신해철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웬걸, 실제 모인 사람은 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신해철의 요구는 북한 체육행사에 동원된 10만 인파 같은 소리를 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음역대마다 균형을 맞춰 배치하니 실제는 40명 정도의 목소리만 쓸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걸 12트랙에 나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운드로 만들어낸 것이다. 인터뷰, 정리 한명륜


성지훈 대표는

“형, 그렇게 연배가 높으신 줄 몰랐어요. 저희가 너무 버릇없었던 거 아니예요?”(김세황) “아냐 그 때 너희들 나이로 묻어가서 좋았어” 실제 이루어진 대화다. 출생연도는 프라이버시라서 이 정도로 짐작하시길. 신해철 음악의 초창기부터 함께 했다. 작곡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제작 전반에 있어 엔지니어링과 곡의 방향 등 음반 전체를 유기적으로 묶어내는 ‘디렉터’였다. 한국에서 ‘음반디렉터’라는 역할의 정체성을 거의 처음 정립한 인물이다. 논현동에서 JFS 마스터링 스튜디오를 6년째 운영하고 있다. 본인은 메틀 쪽에 큰 조예가 없다고 하지만 최근 락, 메틀 뮤지션들에게 JFS는 메카로 소문이 났다. 이에 성 대표는 “조상현(몰 스튜디오) 씨 때문이야”라고 공(?)을 돌린다. H2O의 신작, 알리, 기린, AOA 등 다양한 음악분야에 활발히 기여하고 있다.



HE AND I


N.EX.T - 아버지와 나 from Home (1992)

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복학생이었던 나는 학교 중앙도서관에 자주 갔다. 물론 도서관에 자주 가는 것과 공부 잘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도서관에 자주 갔다. 그런데, 도서관 자리는 비어있을 때가 많았다. 하루는 도서관 아래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방 찾으러 자리에 갔더니 새로 오픈하는 음악 감상실 이용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시인과 농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내에 있는 음악 감상실에 동아리 회원들과 가게 되었고, 갈 때마다 오픈 기념 이용권을 받아 왔다. 그렇게 무료로 어느 정도 음악 감상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시인과 농부는 대전에 처음 생긴 CD 전문 음악 감상실이었다. 당시만 해도 음악 감상실은 대부분 복사판을 틀었다. 그런데 시인과 농부에서 나오는 음악은 클릭음이 없이 정말 깨끗한 음질의 사운드를 자랑했다. 그리고, 감상실에 놓인 스피커. B&W 매트릭스 800 이었다. 소리도 소리지만 그 독특한 외관으로 인해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물론 음악 감상실에서는 대부분 해외의 락음악을 신청했다. 좋은 시스템으로 듣는 음악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줬다. 그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신청했던 음악이 바로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다. 마치 반젤리스(Vangelis)를 연상시키는 심포닉한 사운드와 바로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신해철의 내레이션. 신해철의 음악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많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유행했던 텔넷 기반 PC 음악 동호회를 통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아버지와 나’는 복학생 시절의 어정쩡한 내 상태, 그리고 시인과 농부가 오버랩되며 언제나 뭉클한 감동을 주는 곡이다. 송명하


N.EX.T - Question from The Return Of N.EX.T Part II: The World (1995)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대중음악이 알앤비와 힙합 장르와 같은 해외의 생소한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급변하면서 젊은 신세대의 취향을 맞춘 음악이 주류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대표적으로 랩을 양념처럼 가미한 댄스 음악이 특히 사랑받았다. 바꿔 말하면, 가요계에 ‘락 음악’이 죽어있던 시기였다. 여기저기서 “한국에는 들을만한 락 음악이 없다”는 푸념이 흘러나왔고, 아마도 한국의 그 많던 락매니아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던 때가 바로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필자 또한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변화에 익숙해져 있었고, 한국의 락 음악에 관심을 잃어가던 시기였다. 그때 만나게 된 넥스트의 연작 [The Return Of N.EX.T Part I: The Being](1994)과 [The Return Of N.EX.T Part II: The World](1995)는 그러한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1집의 일렉트로닉 스타일에서 오히려 락 음악으로 선회한 넥스트의 음악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예컨대, 한국형 프로그레시브메틀을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곡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와 ‘세계의 문’은 한국의 락 음악이 결코 세계의 수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음반을 구입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앨범을 감상하며 ‘Question’을 처음 접했던 순간의 벅찬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곡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한, 한국 락 음악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락 발라드다. 지난 20년 동안 삶에 지치고 힘들 때 마다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던 곡이며, 신해철의 충격적인 부고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이 노래를 무한반복하면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이태훈


N.EX.T - Here I Stand For You from Here I Stand For You (1997)

나는 신해철이 넥스트의 데뷔작 [Home]을 발표하던 1992년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그가 넥스트의 첫 활동에서의 마지막 앨범 [Lazenca: A Space Rock Opera]를 발표했던 1997년에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를 보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특히 남자들이라면 상당수는 신해철이 넥스트와 솔로 활동을 통해 발표한 음악 속 가사들을 마치 자신들의 마음을 대변한 메시지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나는 그랬다. 그가 펼친 존재(Being)과 세상(World)에 대한 메시지들은 학생에서 사회인으로의 길을 준비하던 내 인생의 단면에서 어떤 사회과학 서적보다 간결하게 각성과 냉철한 시각을 심도록 도와주었다. 

사실 그는 넥스트 시절의 앨범들엔 ‘사랑 노래’는 별로 담지 않았다. 그러나 몇 안 되는 넥스트의 러브 송들 중 ‘인형의 기사 Part 2’는 90년대 수컷들의 대표적 ‘짝사랑의 송가’였고,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해’는 작곡자 본인이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넘어 가족과 여러 사회적 장벽에 힘겨워하는 모든 연인들을 위한 응원의 노래가 되었다. 그 중 특히 ‘Here I Stand For You’는 대학교 4학년이라는 미래의 불안감과 고독에 시달리던 내 생활에 가장 큰 위안을 주었다. 미래에 다가올 사랑을 위해 내 순수와 신념을 지키겠다는 이 곡의 노랫말을 되뇌며 나 역시 미래의 불안감을 이겨냈던 것 같다. 그리고 곡의 맨 앞-뒤를 장식하는 그의 내레이션은 여전히 내 인생의 좌우명 중 하나다.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 김성환


N.EX.T - 개한민국 from The Return Of N.EX.T Part III: 개한민국 (2004)

이 앨범이 나왔을 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가 미웠다. 이 당시 신해철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갖다 대기 어색한, 독특한 존재였다고 기억한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긴 힘들고’라는 가사에 아직 머물러 있던 나는, 당시 그가 ‘고작’ 음원을 풀지 않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뭔가 이유 없는 좌절감을 환상으로 물들여주던 신해철을 떠올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혼란이야말로 신해철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진 못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배웠고, 그걸 음악으로 풀었다. 성긴 곡의 논리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사운드 밸런스 등은, 넥스트란 이름의 팬들이 기억하는 영광의 순간으로부터 한 발을 나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 다음 문제였다. 물론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 앨범에 열광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넥스트의 음반 중 기억해야 할 음반을 꼽을 때 이 곡을 빼놓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명륜



SELECTED DISCOGRAPHY


무한궤도 / 무한궤도 1집 (1989)

신해철의 음악은 크게 무한궤도 시절의 대중적인 락음악과 솔로 활동 당시의 대중 지향의 순수했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시기, 그리고 강렬한 락음악을 구사하던 넥스트(N.E.X.T) 시절과 테크노와 프로그레시브적 성향의 음악을 진행하던 그 이후의 시기로 나뉜다. 안타깝게도 그 다음 단계를 진행하고자 준비해 나왔던 신해철은 세상을 등졌다. 여러 음악적 모토적인 부분에서 신해철 음악은 무한궤도를 통해 시작되었고, 구심점을 보이며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엄밀히 무한궤도가 발표한 단 한 장의 앨범에 담겨진 모든 수록곡에는 신해철 음악의 지향점이 고르게 녹아내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무한궤도의 음악 안에는 넥스트와 015B 등 한국 대중음악사의 새로운 계보가 확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고종석


N.EX.T / Home (1992)

넥스트의 첫 앨범에서는 솔직히 이후 밴드의 정체성이 되는 ‘클래식 하드락/메틀 사운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도시인’, ‘Turn Off The TV’, ‘영원히’ 등 솔로 시대의 신쓰팝 사운드를 (마치 일본의 티엠 네트워크(TM Network)가 그러했듯) 테크노 락 밴드 포맷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동시에 그가 흠모했던 서구 아트락/크라프트베르크식 전자음악들의 예술 지향주의를 (특히 LP시대 B면을 통해) ‘가정’이라는 주제 아래 하나의 콘셉트 앨범으로 구현한 그의 대담함이 구현되어있다. ‘아버지와 나’처럼 연주와 내레이션 중심의 작품들이 메이저 가요 앨범에 담겨 FM에서 자주 방송되었던 그 시대는 참 아름다웠다. 김성환


N.EX.T / The Return Of N.EX.T Part II: The World (1995)

이전까지 한국 락 음악이 세계 수준에 뒤떨어져 왔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레코딩 퀄리티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넥스트의 본 작은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20년 전에 나왔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사운드의 질적인 향상 면에서 실로 기념비적인 성과를 동반한 작품이다. 이는 세심한 편곡에 주의를 기울이고 많은 제작비를 감수하면서 해외에서 레코딩을 마무리하는 완벽주의를 추구한 신해철의 장인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로그레시브메틀을 지향한 앨범의 혁신적이고 완성도 높은 음악성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태훈


신해철 / 정글 스토리 OST (1996)

신해철이 1990년대에 발표했던 넥스트의 멤버로서가 아닌 솔로 작업들과 OST들 가운데 이 앨범은 가장 주목해야 할 음반이자 최고작이다. 비록 윤도현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자체는 ‘망했으나’, 이 사운드트랙은 그가 넥스트의 포맷 속에서는 다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던 다양한 락 사운드의 욕구를 충분히 해소하는 구실을 했다. 인더스트리얼 락으로 구현한 산울림의 커버 ‘내 마음의 황무지’와 처절한 심포닉메틀 발라드 ‘절망에 관하여’, 당시엔 샴푸(Shampoo)의 ‘Trouble’의 레퍼런스(?)란 의혹도 샀지만 신쓰 팝과 락큰롤, 랩의 흥겨운 조화를 담은 ‘아주 가끔은’, 정공법으로 펼쳐낸 드라마틱한 팝/락 트랙 ‘70년대에 바침’까지 전곡이 우수했다. 김성환


N.EX.T / Lazenca : A Space Rock Opera (1997)

클래식락/헤비메틀을 아끼는 모든 매니아들에게는 넥스트의 현재까지의 단연 최고 작품은 누가 뭐래도 이 앨범일 것이다. [Return Of The N.EX.T] 시리즈에서도 완벽하게는 구현하지 못했던, 신해철이 꿈꾸었던 ‘서구 클래식락의 이상적 사운드’가 드디어 100% 구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세황-김영석-이수용의 연주 면에서의 팀워크가 정점에 올랐던 것도 한 몫을 했고, ‘Lazenca, Save Us’와 ‘The Power’에서 느낄 수 있듯, 유럽식 심포닉메틀의 매력을 자신의 곡 속에 완벽하게 녹여낸 신해철의 역량 역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당시에 그가 넥스트를 해체하며 밝힌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라는 말이 적어도 이 앨범을 들으면 허세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환


N.EX.T / The Return Of N.EX.T Part III: 개한민국 (2004)

2004년 새로운 멤버와 함께 재결성되어 돌아온 넥스트엔 스타인버거 기타와 함께 화려한 테크닉을 뽐내던 김세황도 없었으며 신해철 못지않은 작곡 센스를 가진 베이시스트 김영석도, 한국 마사회 회장이라며 농담거리가 되었던 드러머 이수용도 없었다. 그들의 빈자리는 비트겐슈타인을 함께 했던 꽃미남 기타리스트 Devin Lee와 젊은 베이시스트 쌩, 닥터코어911 출신의 드러머 쭈니, 키보디스트 해리가 채우게 되었는데, 멤버들이 바뀐 만큼 음악적 성향도 과거의 스케일 큰 프록메틀 사운드에서 뉴메틀/얼터너티브메틀 위주의 사운드로 재편되었다. 일단 앨범의 싱글로는 미들템포의 하드락 ‘Growing Up’이 선정 되었지만 각각 Disc 1과 2로 발매된 더블앨범 성격의 본 작에서 가장 중요한 곡을 고르라면 역시 ‘개한민국’과 ‘감염’, ‘Generation Crush’ 등을 꼽을 수 있겠다. 200프로에 달하는 대기록(?)을 세웠던 4집과 정 반대의 위치에서 디지털 녹음을 과감히 사용하여 만든 사운드의 퀼리티가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프로듀서 신해철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발매 당시에는 실망스럽다는 평이 다수였으나 사운드 적 측면에서 앞으로도 오래도록 좋은 소스가 될 앨범. 보컬측면에서 후렴구만 되면 고음으로 저 멀리 달아나기 일쑤였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신해철 본인에게 더욱 잘 맞았다고 생각되는 중, 저음역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90년대의 넥스트와는 다르지만 분명 허투루 만든 앨범은 아니다. ShuhA


N.EX.T / Re-Game? (2006)

새로운 멤버로 재결성한 후, 이번에는 넥스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3, 4집의 멤버들과 재결성 넥스트의 유닛으로 밴드는 그야말로 환상의 라인업이 됐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 음반이 나올 무렵, 그 라인업에 신경을 쓴 나머지 음악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새롭게 연주된 기존 곡들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내 안에서 자리 잡고 있던 곡의 원형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신해철의 안타까운 부고 이후 다시 꺼낸 이 음반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정말 ‘작정하고’ 만든 의도가 전달된다고 할까. 물론 이건 ‘업그레이드’의 개념이 아니다. 원곡이 가지고 있던 의도를 한참이 지난 후 다시 회고하며 돌아보는 의미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에서 들을 수 있는 신해철의 내레이션은 더욱 마음을 파고든다. 노래할 때 그 대상은 달랐지만, 그가 떠난 후 다시 듣는 ‘Last Love Song’은 마치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인 듯 듣기 불편할 정도로 격한 감정으로 절규한다. 


단 한번 이라도 나와의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 있니

만일 그렇다면 정말로 그랬었다면

뒤늦은 부탁을 들어 주겠니


날 잊지 말아줘 괴로워 해줘

도저히 못 견딜 만큼 당장 죽고 싶을 만큼

지금의 나처럼


이젠 정말 ‘Last Love Song’으로 남게 됐다. 송명하



[파라노이드 통권 23호] 너무 빠르고 안타까운 상실, 신해철의 삶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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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노이드